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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노래- 이시카와 다쿠보쿠 ?
1 동해 바다의 자그만 갯바위 섬 하얀 백사장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벗하였도다.
모래언덕의 모래에 배를 깔고 첫사랑 아픔 수평선 저 멀리 아련히 떠올리는 날
촉촉이 흐른 눈물을 받아 마신 해변의 모래 눈물은 이다지도 무거운 것이런가
6 새로 산 잉크병 마개 열고 나니 신선한 냄새 굶은 배 속 스미어 슬픔 자아내누나
일을 하여도 일을 해도 여전히 고달픈 살림 물끄러미 손바닥 보고 또 보고 있네.
어느 날 문득 술 마시고 싶어서 못 견뎌하듯 오늘 나는 애타게 돈을 원하고 있네
서글프게도 머릿속 깊은 곳에 절벽이 있어 날마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듯
7 어느 날의 일 방문의 창호지를 새로 바르니 그날은 그것으로 마음 평온하였네
새로워지는 내 마음 찾고 싶어 이름 모르는 이 거리 저 거리를 오늘도 헤매었네
친구가 모두 나보다 훌륭하게 보이는 날은 꽃 사 들고 돌아와 아내와 즐겼노라
1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とうかいのこじまのいそのしらすなに) われ泣きぬれて (われなきぬれて) 蟹とたはむる (かにとたはむる)
砂山の砂に腹這ひ (すなやまのすなにはらばひ) 初戀の (はつこひの) いたみを遠くおもひ出づる日 (いたみをとほくおもひいづるひ)
しつとりと なみだを吸へる砂の玉 (なみだをすへるすなのたま) なみだは重きものにしあるかな (なみだはおもきものにしあるかな)
6 新しきインクのにほひ (あたらしきインクのにほひ) 栓拔けば (せんぬけば) 餓ゑたる腹に沁むがかなしも (うゑたるはらにしむがかなしも)
はたらけど はたらけど猶わが生活樂にならざり (はたらけどなほわがくらしらくにならざり) ぢつと手を見る (ぢつとてをみる)
とある日に (とあるひに) 酒をのみたくてならぬごとく (さけをのみたくてならぬごとく) 今日われ切に金を欲りせり (けふわれせちにかねをほりせり)
かなしくも 頭のなかに崖ありて (あたまのなかにがけありて) 日每に土のくづるるごとし (ひごとにつちのくづるるごとし)
7 ある日のこと (あるひのこと) 室の障子をはりかへぬ (へやのしゃうじをはりかへぬ) その日はそれにて心なごみき (そのひはそれにてににるなごみき)
あたらしき心もとめて (あたらしきここるもとめて) 名も知らぬ (なもしらぬ) 街など今日もさまよひて來ぬ (まちなどけふもさまよひてきぬ)
友がみなわれよりえらく見ゆる日よ (ともがみなわれよりえらくみゆるひよ) 花を買ひ來て (はなをかひきて) 妻としたしむ (つまとしたし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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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다쿠보쿠! 그 이름을 나는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 ‘중심 속의 타자화된 변방’으로 기억한다.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ㅡ”(‘코코아 한 잔’)로 시작하는 시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가슴에 권총 세 발을 발사한 후 “대한만세”를 외쳤던 식민지 지식인,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마음에 닿아 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코코아 한 모금의 씁쓸한 뒷맛이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이라니! “세계 지도 위 이웃의 조선 나라/ 검디검도록/ 먹칠하여 가면서 가을바람 듣는다”(‘9월 밤의 불평’)라는 시 또한,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 강제 병합을 발표하면서 새빨갛게 칠한 조선의 지도를 신문에 보도한 것을 보고 읊었다고 한다. 명치 43년 그러니까 서기 1910년의 가을을 그는 이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누가 나에게 저 피스톨이라도 쏘아 줬으면/ 이토오 수상처럼/ 죽어나 보여 줄걸”이라는 뒤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 역시 안중근의 마음을 가늠하고 있다. 자기 색깔의 강제가 타인을 유린하고 먹칠하는 일임을 알고 있기에 그는 그 자괴감을 저격되고 싶은 욕망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일본의 국민 시인 다쿠보쿠는 우리의 소월과도 같다. “나의 노래는 슬픈 장난감”이라고 노래했듯 다쿠보쿠는 일본인들의 보편적 정서와 애한(哀恨)을 단가(短歌)라는 일본 전통시가 형식으로 읊곤 했다. 가난과 불화와 고독에 시달리던 그는 폐결핵으로 26년 2개월의 짧은 삶을 살다 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를 비롯해 아내와 두 딸들까지 모두 폐결핵으로 죽었다는 것 또한 시대적 저주에 가깝다.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반항과 연애와 이른 결혼으로 요동쳤던 10대의 삶, 방랑과 빈곤과 객혈 그리고 요절로 끝났던 20대의 삶, 짧은 생을 관통했던 낭만적 이상과 혁명에의 갈망 등으로 요약되는 극적인 삶은 그의 시를 더욱 웅숭깊게 하고 있다. 그는 지식인이었고 반항아였고 혁명가였다. 로맨티스트이자 아이디얼리스트였고, 막시스트이자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우리의 백석 시인은 백기행이라는 자신의 본명 대신 다쿠보쿠의 성(姓)인 이시카와(石川)에서 ‘石’을 따와 필명으로 삼았을 만큼 그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다쿠보쿠 또한 하지메(一)라는 본명 대신 ‘딱따구리’(탁목, 啄木)라는 뜻의 필명을 썼다. | |
551수로 이루어진 ‘나를 사랑하는 노래’는 5장(章)으로 나누어진 가집(歌集) [한 줌의 모래] 중 첫 번째 테마다. 초록(秒錄) 번역된 것 중 1, 6, 7번 시를 소개한다. 그 1번은 1908년에 발표했던 시다. 여기서 “동해”는 일본 동쪽 바다로, 소설가로서의 야망이 좌절되고 원고를 쓰려고 해도 종이와 잉크마저 없는 극한 상황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찾아갔던 하코다테의 오오모리 해변으로 추정된다. 백사장에 작은 게들이 기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자살을 잊고 돌아와 쓴 시라 한다. “사람들 모두/ 똑같은 방향으로 가고들 있다/ 그 모습을 옆으로 보고 있는 내 마음”(‘슬픈 장난감’), “갈 길 모르면서, 지쳐 헤매어/ 더듬어 가는 것”(‘게에게’)에서처럼 그의 시에서 게의 이미지는 자주 반복된다. 바닷물이 밀려들면 모래(뻘) 속으로 기어들고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모래(뻘) 속에서 기어 나와 온종일 옆으로 걷고 있는 게는 시인 자신이자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해변의 모래가 눈물을 받아 마셔 그리 무겁다는 것을, 눈물에 젖은 모래 위를 오가기에 바다가 그리 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시다. 그렇게 눈물에 젖은 것들은 옆으로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옆으로 걷는 것들끼리는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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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살 돈도 없고 원고지도 다했다. 물론 하숙비도 지불하지 못했다. (중략) 내일부터 뭔가 쓰려 해도 종이가 없다. 잉크도 적다.”(4일), “긴다이치군이 옷을 전당 잡혀 12金을 꾸어 주었다!”(11일), “긴다이치군이 또 5엔을 꾸어 주었다.”(12일), “긴다이치군에게 20전 빌려 세타가야에 갔다.”(28일)…… 1908년 6월의 일기는 다쿠보쿠가 얼마나 궁핍했는지를 보여 준다. 고향 선배 긴다이치가 자신의 옷을 전당포에 맡기고 빌려 준 이런 절박한 돈을 그는 목련꽃과 꽃병을 사는 데 써 버리기도 한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어떤 구멍에 갖다 맞추려 해도 적합하지 않는 쓸모없는 열쇠 같은 인간이라 자조한다. 6번의 시에서 “일을 하여도/ 일을 해도 여전히 고달픈 살림/ 물끄러미 손바닥 보고 또 보고 있네”와 같은 구절은 핍진한 그의 삶의 기록이었다. 실제로 그의 삶은 반항과 유랑과 좌절의 연속이었고 그의 빛나는 시편들은 그러한 삶의 바닥에서 빚어낸 진주였던 셈이다. “머릿속 깊은 곳에 절벽이 있어/ 날마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니!
다쿠보쿠는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세 개 있다. 하나도 어린아이의 마음, 둘도 어린아이의 마음, 셋도 어린아이의 마음. 아! 태어난 그대로 죽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라며, 어린아이의 마음을 참되고 아름다운 최상의 것으로 꼽은 바 있다. 이미 눈치챘겠으나, 그의 시는 마음의 지도다. 그가 “시는 이른바 시여서는 안 된다. 인간의 감정생활(좀 더 적당한 말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의 변화의 엄밀한 보고, 정확한 일기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을 때 그 ‘감정생활’의 단편적인 ‘보고’나 ‘일기’란 곧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는” 마음의 기록이다. “친구가 모두 나보다 훌륭하게 보이는 날은/ 꽃 사 들고 돌아와/ 아내와 즐겼노라”라는 7번 시의 구절은 차가운 거리를 헤맸던 어느 날에 대한 마음의 보고이자 일기다. 그 어느 날은 아마 잊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나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시의 제목은 드높다. 1894년의 청일전쟁, 1905년의 러일전쟁, 1910년의 대역(大逆)사건과 한일 강제 병합 등 일본 역사상 최대의 변혁기를 살았던 다쿠보쿠에게 이 제목은 맑고 꼿꼿한 선언과 같다.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채 옆으로 옆으로 휩쓸렸던 광포한 ‘폐색의 시대’에, 스스로를 세우며 스스로를 지키며 스스로를 울력하려 했던 그 마음의 자리가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1912년 4월 13일이 기일이라니 다쿠보쿠가 요절한 지 딱 100년이 지났다! |
이시카와 다쿠보쿠 (石川啄木, 1886.2.20~1912.4.13)
이와테 현(岩手縣)에서 태어났다. 모리오카 중학을 중퇴하고 본격적으로 문학을 하기 위해 동경으로 올라가 요사노 텟강 등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신시사(新詩社)’ 동인이 되어 단가, 시 등을 발표하였다. 1905년 첫 시집 [동경]을 출간해 조숙하고 낭만적인 시재를 발휘하였고 세츠코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같은 해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의 교원이 되었으나 파업을 일으켜 교장을 전출시키고 자신도 면직되었다. 북해도로 이주한 뒤로는 줄곧 직장을 찾아 유랑했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딸을 데리고 가출했다. 1910년 일본 천황을 죽이려 했다는 명목으로 사회주의자 스물여섯 명이 사형당하거나 수감되었던 대역(大逆)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사회주의 경향의 시를 발표했고 그럴수록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만년에 도키 젠마로와 잡지 ‘나무와 열매’를 기획하는 등 청년 계몽에 힘썼으나 신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2년 스물여섯 살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대표 가집으로 [슬픈 장난감], [한 줌의 모래] 등이 있다.
<dt>글 정끝별 </dt> <dd>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