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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약력...펌

맘편한넘 2013. 9. 22. 23:12
제목이효석은 어떻게 살았나?작성자관리자
첨부파일작성일2006-06-30
이효석은 어떻게 살았나


직업


문학가


이효석의 직업은 문학가이다. 그가 전업 문학가였던 시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총독부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극히 짧으며, 나머지 시기는 교사 또는 교수라는 다른 직업을 겸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의 직업은 문학가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는 창작여담 [화분을 쓰고]라는 글에서 자신을 '따로 직업을 가진 몸'이라고 하였으니, 교수가 본업이고 작가는 겸업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는 주로 소설가로서 활동하였지만, 습작기에는 시를 많이 썼고, 그 밖에도 희곡과 시나리오, 평론 등 문학과 관련된 여러 장르의 글을 썼다.
전성기의 그에게는 집필 의뢰가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글쓰는 고통을 호소하는 글을 일기나 수필에서 남기고 있다. 특히 다른 작품은 쓰지 못한 채 매일 일정한 양을 꼬박꼬박 써야 하는 신문 소설 집필에 몹시 시달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산작가라는 말을 흔히 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맞지 않는다. 따로 직업을 가진 몸으로 비교적 다산적이라는 뜻인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다산일 것이 없다"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가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느 설문에 답하기를 "다시 공부한다면 역시 문학이다"라고 하였고, 또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은 좋은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교직자


그가 가졌던 다른 직업은 몇 개월간의 공무원을 제외하면 모두 교직이었다. 즉, 경성농업학교 교사(1931∼1934), 숭실전문학교 교수(1936-1938),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1939-1940)에 재직하였다.
교직에 있을 때 맡은 과목은 영어영문학이었으므로 직접적인 문학 교육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문인들이 어문학 계열의 교직에 종사하면서 문필 활동을 겸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간접적인 문학 교육에 종사하는 것처럼 이효석도 그런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방문을 닫아 걸고 집필에 몰두하는 식으로 "문학도 하고 반면에 다른 생활도 살리고" 있다.
그러나 "맡고 있는 어학의 교수가 정신교육, 정서 교육의 계열 속에 섰다"(인물시험)라고 생각하였던 그는 교육자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대동공전 교수 시절 그는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는 학생들에게 맨스필드의 시를 낭송해 주는가 하면, 입센, 토마스 만, 콕토의 작품들을 해설해 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다른 강의시간에 곧잘 결석하곤 하던 학생들도 이효석의 어학시간만은 '어버이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 마음과도 같은 기대를 갖고' 기다리곤 했다고 한다.




재산과 수입


재산


이효석의 부친의 가산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제일교보 학적부의 기록에 의하면 부친의 재산은 6천 원이고 학자금은 25원이었다. 양자를 따로 들여 농사를 지었고 자신은 면장으로 일을 했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특히 대학 시절과 대학 졸업 후 무직자로 지낼 시절 경제적으로 무척 어렵게 지냈다. 그는 대학을 다닐 때 네 명이 함께 자취를 했는데 솥에 담긴 밥에 선을 긋고 떠먹었다고 하며, 대학 졸업 후 무직자 시절에는 "한끼에 십 원 짜리 밥을 먹으러 밥에다 된장국과 김치 쪼가리 정도를 주는 싸구려 밥집으로 다녔을 때가 많았다"라고 전해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성년이 된 이후 고향 친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별로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경제적 상황이 좋아진 것은 경성의 토박이 몇 십만대 호농의 딸과 결혼한 이후이다. 경성에 살 때의 집의 형세와 일상생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처가의 지원 또는 외딸이었던 부인의 지참금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인을 소재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향수]에서는 부인 친정의 넉넉한 가산을 묘사하는 글이 소개된다.
부인이 재산 형성에 큰 기여를 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그가 평양 창전리에 마련한 주택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할 무렵에 마련한 이 주택은 그가 받는 초임교수의 봉급과 집필 수입으로 구입,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좋은 집이었다. 그는 넓은 정원과 목욕탕과 지하실이 딸린 이 벽돌집에서, 피아노, 축음기, 침대 등을 두고, 양식을 즐기면서 유복하고 쾌적한 생활을 하였다.

수입과 지출


그러나 그가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별로 저축을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갑자기 별세한 다음 유가족들은 무척 힘든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수입원 중에서 안정적인 것은 매달 일정하게 받는 교수 봉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가로서 얻는 수입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첫 고료]라는 수필에서 "원고지 1매에 50전을 받으며,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수입"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많이 쓸 때에는 한 달에 200매를 쓴다고 하였으니, 고료 수입은 100원은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원고료를 지불하는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서 무명작가들은 거의 수입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도 그는 경성에서 농업학교 교사로 있던 시절, 영어 개인교습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적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또 그만큼 많은 지출을 했던 것 같다. 1937년 {조광} 2월호의 설문에 의하면, 그는 물가가 올라가는 데에 대하여 "대책을 세우고 어쩌고 그런 잔 생각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돈 모을 생각은 없고, 생기는 대로 모조리 쓰고 싶은 생각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단 네 식구뿐이나, 매월 수입이 다 들어간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지출에는 가족의 생활비뿐 아니라 그가 지닌 저택의 유지 비용, 유별난 식생활에 드는 비용, 그의 다양하고 호사스러운 기호와 취미생활의 비용, 병 치료비, 보약과 건강식품 구입 비용, 친구와 어울리는 지출 등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부인의 알뜰한 살림솜씨를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다.


건강


약한 신체에 대한 자각


자의식이 강한 이효석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무척 관심이 많았다. 그는 [계절의 낙서]라는 글에서 스스로 "수신 척골은 아닌 지경이라도 말하자면 여윈 편이다"라고 자신의 신체를 평한다. 또 어느 설문에서 "인체 중에 한 가지를 더 가진다면 안경을 안 써도 좋도록 눈을 갖기를 원한다"라고 답한다.
또 [괴로운 길]이라는 글에서 한 되 이상의 코피를 쏟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원인으로서 "몸의 쇠약을 들고, 그 쇠약의 원인은 과로이며, 과로는 다섯 달 동안에 천 매의 원고를 쓴 집필에서 오는 것"이라고 스스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힘든 집필 뿐 아니라 며칠씩 연달아 술을 마시기도 하고 새벽에 귀가하기도 하는 등 불규칙적인 일상생활, 공복의 커피 마시기 등도 그의 건강에 좋지 않았다.


예민한 신경


또 그는 집필을 할 때 두통을 앓았고 자주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몹시 '슬픔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이런 그의 성격은 그의 일기와 가족의 증언에서 잘 알 수 있다.


잦은 병치레
그래서 그가 자주 병치레를 하고 입원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쇄사]라는 수필에서 "병이 잦았던 까닭에 근대 의료의 세례를 알뜰히도 받는 나였다[만은]"라든지, [비상의 추와 나의 독서]라는 수필에서는 6주일 동안이나 입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늑막염을 앓기도 하였는데, 급성 결핵성 뇌막염으로 별세하였다.


건강 증진책
그래서 그는 "건강, 명예, 금전 중에서 건강이 더 좋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의 건강 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겨울철 한가한 시간에는 반드시 몸의 보온을 유지하기 위해 종일 자리에 누워지냈다는 일기의 기록이 있고, 몸에 좋은 우유, 목장에서 갓 짜서 새벽에 집으로 배달하는 신선한 우유를 즐겨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우유 예찬론 중의 으뜸은 다음과 같은 글이다.

우유를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지금에 있어서는 가장 원하는 세상이며 바라건대 거리의 복판마다 냉장의 우유 탱크를 세우고 오고 가는 시민에게 자유로 마시게 하거나 혹은 수도와 마찬가지로 지하에 우유도를 묻고 각 가정에서 나사만 틀면 적량의 신선한 우유가 언제든지 졸졸 쏟아지게 하는 설비가 국가 경영으로서 하루바삐 생겨질 날을 공상―이 아니라 충심으로 원하는 바이다.(채롱 우유)




그는 또 보약도 자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건강 증진책으로 성공한 경험에 대해 "시절을 가려 강장제를 복용하는 것도 좋다"라는 생각을 어느 설문에서 표현하고 있다.

지난 겨울에는 보제를 5재나 쓴 결과 관 반이나 체중이 늘었던 것이 봄을 잡아들면서부터 도로 나무아미타불이었다. 올해는 약의 힘을 버리고 간유와 버터의 섭취를 주로 했더니 요새 와서 여름보다는 3백관[근]이 불었다. 그 모양으로 한 겨울을 지나면 보제의 힘을 빌 것 없이 자연스럽게 관 반은 늘 것 같다.(계절의 낙서)

다른 건강 증진책


그는 건강 증진책으로 성공한 경험에 대해 강장제와 더불어 "여름 한 철의 해수욕이 확실히 효험이 있다"라고 하면서 해수욕 애찬론을 펴고 있다. 또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하니, 해수욕은 단순한 육체의 건강 뿐 아니라 정신의 건강에 좋음을 설파한다.

여름 한 철이라도 이용하여 좀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볼까 한 것이 이번 길의 한 가지 목적이기도 합니다.
몸에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한 것을 걸치고 음식도 단순하게 마늘, 파를 생 채로 씹고 고기도 될 수 있는 대로 날 것을 먹고 조개와 섭게는 바다에서 뜯어온 채로 삶고―음식과 피복과 거처를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게 하여서 바다와 일광 속에서 몸을 데우고 위장을 단련시켜 보려는 것이 이 여름의 계획입니다.(인물보다 자연이 나를 더 반겨주오)

또 그는 산보를 즐겼다. 이는 사색과 명상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걷는 것을 운동으로 여기는 마음도 컸던 것 같다.

운동 부족이 될까를 경계해서 학교에서 나가는 시간을 이용해 다방까지 걸어가고 다방에서 다시 집까지 걸어가는 이 코오스를 작정하고도…집에서 학교까지 10분, 학교에서 다방까지 20분, 다방에서 집까지 30분 가량의 거리―이 만큼만 걸으면 하루의 운동으로 족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낙랑다방기)

그는 이밖에도 서울 살 적에는 스케이트, 평양 살 적에는 스키 등 겨울 스포츠도 즐기기도 하고, 경성에 살 적에는 마당에서 캐치 볼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그는 온천이나 목욕도 무척 즐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위생에 대해서도 무척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식사할 때에는 항상 손을 먼저 씻었는데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식생활


이효석의 음식론


이효석은 [계절의 낙서](1940)라는 글에서 음식론을 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음식을 말하기를 즐겨한다고 고백하는데, 그 까닭은 동료 노교수 같이 박사이고 고명한 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여위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윈 사람은 음식을 말하기를 즐겨한다고 한다……나도 음식을 말하기를 즐겨한다는 것은……말하자면 여윈 편이라는 것이다.……나에게 있어 체중의 증감은 대단한 관심사인 것이며―다시 말하면 장대한 육체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음식의 설화가 수다스럽다고 하더라도 문책을 받을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집에 다양한 식료품과 기호품을 저장하는 생활을 한다. 지하실에 순수한 버터 뿐 아니라 사과, 배, 밤, 고구마, 자반 정어리, 야채, 머루주 등을 저장한다고 고백한다.


가난하던 시절의 식생활
그의 일생에서 가장 오래 생활한 곳, 그리고 어린 시절에 음식 맛을 들인 곳은 서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서울 생활에서 가난한 하숙생활, 자취생활을 하면서 음식다운 음식은 제대로 먹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제대로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은 결혼 이후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평양에 살면서 서울 음식 맛을 그리워한다. 평양 냉면보다 서울 냉면을, 또 장국 대신에 설렁탕을 높이 친다.


일상 식사
그는 결혼 후 안정된 생활을 하던 시절 어떤 설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조반을 "이색 음식을 먹는 때도 있으나 항용 늘 먹는 밥과 부식물을 먹는다. 식후에는 농장에서 오는 우유를 반 컵씩이나 벌떡벌떡 마신다"라고 한 적이 있다.
좋아했던 서양음식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음식은 오히려 서양음식이었다. 그는 어느 설문에서 '한 달에 5,6회나 한다고 하였으니' 가족과 외식을 꽤 즐긴 편인데, 이때에도 주로 양식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도 호텔의 아늑한 식당에서 양식을 즐기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이런 식성은 다음과 같은 차녀 유미의 회고에서도 증언된다.

아버지의 식성을 까다로왔고 마치 아버지의 소설에 등장하는 유래나 미란, 단주, 현마 같은 서구풍의 이름들과 식성 또한 일맥상통되는 것 같다.……우리들의 식탁에는 버어터나 빵 그리고 통조림이 된장국보다 자주 올랐고 삶은 옥수수를 우유 맛에 비교하며 풋사과는 삶아서 예쁜 유리그릇에 담아먹는 것이다.(아버지의 추억)

아버지의 식성은 양식을 좋아하셨습니다. 집에는 즐 버터나 통조림이 떨어지지 않았고 혹시 우리들을 데리고 외식을 할 때는 양식집으로 가거나, 아니면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는 공원 안의 음식점이었습니다. 되도록 구석, 아늑한 장소라고 생각되는 테이블, 약간 흐리고 발간 식탁보. 가운데는 램프 비슷한 게 놓여 있었고 메뉴는 늘 런치였습니다.……밀감으로 만든 잼을 즐겼고, 수우프는 야채였습니다.

별미


그는 [유경식보]라는 수필에서 그의 식성과 평양 음식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는 서울 음식에 입맛을 들여서 그런지 평양 냉면에 맛을 들이지 못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평양의 만두, 일종의 전병인 노티, 김치, 어죽 등을 높이 치고 있다. 특히 '찬 하늘 아래에서 벌벌 떨면서 먹은 김치 맛'을 잊지 못한다.
이밖에 평양식 불고기를 연한 전골(스끼야끼)이나 고소한 갈비보다 더 맛있다고 친다. 소담하기 때문에 몇 근이고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또 그는 단 과자 종류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커피
이효석의 기호품으로서 으뜸은 뭐니뭐니해도 커피이다. 그는 1932년 2월 어느 날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으니, 경성 살면서부터 커피 맛에 깊이 빠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나남 가서 진하고 뜨거운 코오피 한 잔 먹었으면―으슬으슬 추우니 반일 동안 코오피 망상만 나다. 이제는 거의 인이 박힌 듯하다. 평생 코오피 편기하였다는 발자크의 풍류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결에 깊이 인이 박혀 버린 것이다."(3일간)

그는 식민지 치하의 궁벽한 시골에서나 전시 상태에서나 늘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 같은 질 좋은 커피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그는 경성 살 때 나남의 <동>이라는 끽다점에 힘들여 가서 좋은 커피를 마신다. 또 평양에 살 적에 다방에 가는 것을 즐겼는데, 여기에서도 커피 맛에 대해 만족을 하지 못한다. 가끔 서울에 가서 모카 커피를 구해다가 퍼콜레이터로 끓여 마시는 기회가 있으면 무척 기뻐하였다. 지금도 여느 사람들이 즐기지 못하는 커피 풍류를 그는 60년도 전에 이미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향기로운 홍차를 좋아할 줄도 알았다. 그는 집에서도 커피 말고 홍차를 들기도 하였고, 다방의 홍차 맛을 탓하기도 하였다.



커피 이외의 기호품에 대해 그는 포도주에 대한 예찬론을 펴고 있다. 몇 해를 두고 벼르다가 그는 진짜 포도주 대신에 머루주를 담그고서 무척 기꺼워함을 [계절의 낙서]에서 또한 고백하고 있다. 또 그는 [영서의 기억]이라는 수필에서 머루와 다래를 예찬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포도주를 무척 즐겼는데, 이는 맛보다는 멋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그가 동경하는 유럽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포도주를 꼽았고, 또 유럽의 문학 작품에 나오는 포도주, 또는 문인들과 얽힌 포도주의 일화를 동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등나무의자에 앉아 음식을 들 때면, 끓인 커피나 홍차를 마실 때도 있지만, 레몬 스카치나 포도주를 큰 유리잔에 조금 붓고는 그대로 냄새만 즐기기도 했다"(새 자료를 통해 본 이효석의 생애).
그의 주량에 대해서는 "학부 시절의 주량은 두주급이었고, 대체로 통음하는 편이었다"라는 증언이 있다. 그래서 "맥주를 한 타나 마시는 동안에 세 시 가까워서야 집을 나오게 되었다"라든지,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소주와 풋고추와 어죽을 즐겼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포도주 이외의 다른 술도 즐겨 마셨고, 또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휩쓸려 늦도록 타령을 하다가 곤드레만드레 취한" 적도 있듯 술을 무척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미혼의 서울 생활에서 문화계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술을 무척 마셨다는 기록도 있으며, 담배 맛을 알면서 술의 진미를 알게 되었다는 고백도 있고, "연일 타령에 몸이 말할 수 없이 피곤하다"라는 일기도 있다.


담배


그는 어릴 때에도 담배를 핀 적은 있으나 30이 넘어서 담배맛을 제대로 알기 시작하였다. 그는 [만습기]라는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담배 맛을 논하고 있다.

그 쓰고 떫고 향기로운 맛을 비로소 안 것이다. 향기롭다고 해도 꽃의 향기도 아니요, 박하의 향기도 아니요, 소년의 향기도 아닌 어른의 향기의 맛을 비로소 알고 어른의 세계에 비로소 들어온 것이라고 할까.……술의 진미와 코오피의 도미를 깨달은 것과 함께 담배의 맛을 즐기게 된 것이 사실이다…즐기는 담배와 생생한 문학관을 관련시켜 생각해 봄이 망발은 아닐 듯싶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이 물방앗간 사연을 펼치기 위해 담배를 한 대 피어 무는 대목은 바로 이런 맛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옷차림과 집차림


옷차림
그는 어느 설문에서 "토산으로 만든 조선옷은 입어 본 적 퍽 오래 된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서양식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는 대학 예과 시절부터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곤색 '세비로'양복을 입고 다녔으며, 대학 졸업 후에 무직생활을 할 때에도 여자 구두 모양으로 나비 장식이 붙은 칠피 단화를 신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본능적으로 복장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다.
그가 남긴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보면 집에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혼자 정원을 거닐 때에는 매우 홀가분한 차림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또 해수욕을 할 때에는 아예 나체로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일상생활에서는 늘 타인을 의식하는 심리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근저에는 자연과 친화하면서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나는 옷을 벗고 잠방이 하나만을 걸치고, 그 초목 속에 뭏혀 그들과 완전히 동화되기를 원합니다. 다만 그 마지막 잠방이까지를 벗어 버리지 못하는, 사람된 비애를 불서럽게 여길 뿐입니다. 초목은 벌거숭이의 나와 함께 즐겨하며, 뭇뭇 감정을 나눕니다.(바다로 간 동무에게)

몸에 실 한 파람 걸치지 않고 유유하고 자유롭게 모래 위를 거닐었다 바닷물에 잠겼다 하면서 긴 날을 결코 무료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무료하지 않음은 나의 결혼에서 왔던 것이다. 나는 원시적 자태로 처녀 해변에서 날마다 결혼한 것이다.(처녀 해변의 결혼)

집차림
그의 평양 '푸른집'은 그의 일상생활에서나 작품에서나 무척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평양 교외에 있으며, 넓은 정원 속에 숨어 있는 붉은 벽돌집으로서 목욕탕, 지하실, 피아노가 놓인 거실 등이 있는, 마치 '산장' 같은 집이었다.
그는 이 집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특히 그는 정원을 잘 가꾸면서, 큰 취미인 화초 가꾸기를 제대로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술회를 빌면, 실내장식은 무척 간결하였고, 다만 서가 위에 꽃이 빠질 새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멋을 부렸던 것으로 보이다. 거실 벽에는 피아노와 마주 보는 벽에 쇼팽의 초상화를 붙여 놓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그가 남긴 사진을 보면 그는 크리스마스를 맞으면 벽에 'Merry Christ-
mas'라고 크게 써 붙이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취미


음악
이효석은 어느 설문에서 "음악을 들을 때 삶의 기쁨을 통절히 느낀다"라고 대답한 바 있는데, 사실 그는 대단한 음악, 특히 서양 음악 애호가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다른 설문에서 "기악을 즐겨 해서 몇 가지 시험해 보았으나 정성을 안 들이는 까닭에 하나도 성공에 달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겸양해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무척 귀했던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고 가끔 쇼팡의 곡을 칠 정도로 잘 쳤고 또 기타를 치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또 그는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독일어로 유창하게 부르기도 했는데, 그때에는 렌즈가 두껍던 안경 속 눈빛은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고 한다.
또 그는 축음기를 집에 갖추고 음악을 즐겼고, 다방에 나가서도 커피를 곁들이면서 서양 고전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그는 협주곡보다는 소나타를 좋아했다고 하며, 때로는 샹숑이나 재즈도 들었다고 한다. 다음은 그의 차녀 유미의 회고이다.

서재에 놓여 있던 야마하 피아노와, 가끔 즐겨 치시던 쇼팡, 아버지는 음악을 너무 사랑하셨다.(아버지의 추억)

아버지가 만지시던 악기들은 다양했지만 서재에 있던 피아노는 야마하였고 음악을 사랑하는 제자나 친구들이 오면 즐겨 쇼팡을 치시곤 했다.(나의 아버님 이효석)

이 사실은 그의 평양 대동공전 제자 이재현의 회고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나는 가끔 선생을 댁 서재로 찾아가기도 하였다. 저녁쯤 서재 창문 앞까지 당도하면 반드시 모차르트의 론도나 바이올린 소나타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선생이 모차르트의 곡을 사랑하시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하지만 항상 듣는 그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때마다 노크하는 손이 주저되는 것이다.……선생은 가끔 쇼팡의 곡을 즐겨 키시었다.(이효석선생 간호기)

또 그의 수필 중에는 [전원교향곡의 밤], [샹숑 도토오느] 등 아예 음악을 주제로 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이런 취향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는 인물들을 자주 등장시키고 있다. 또 [화분]같은 소설에서는 줄거리와 심리적 묘사를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의 악장을 연계하여 전개하기도 한다.

연회가 끝난 후 여흥으로 부부의 피아노 두엣의 연주가 있었다. 건반 앞에 나란히 앉아 가벼운 곡조를 울리는 두 사람의 자태는 그대로가 바로 곡조에 맞춰 승천하는 한 쌍의 천사의 자태이지 속세의 인간의 모양들은 아니었다.(가을과 산양)

화초 가꾸기
이효석이 이처럼 음악을 좋아한 것에 못지 않게 화초를 좋아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음악과 꽃에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

꽃을 볼 때와 음악을 들을 때같이 사람이 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없을 듯하다.(녹음의 향기 장미)

그래서 그는 사람이 사람답자면 당연히 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사람이라면 꽃을 보기 좋아하고 또 가지기를 원한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꽃을 사랑하는 것이다. 보기를 좋아하고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다.……꽃을 좋은 줄 모르고 짓밟아 버리고 먹어 버림은 돼지뿐이다. 돼지는 꽃을 사랑할 줄 모른다. 돼지만이 꽃을 사랑할 줄 모른다.……돼지에게까지 꽃을 알리려고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며 그 노력이 실패되었다고 슬퍼할 것도 없는 것이다.(화초 1)

그래서 그는 자주 꽃집에서 꽃을 사기도 하지만, 그의 집 정원에 온갖 꽃을 다 키웠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카카리아, 그 밖에 글라디올러스, 촉규화, 맨드라미, 반금초, 금잔화, 메꽃, 제비꽃, 만수국, 프록스, 따리아, 보언화, 양귀비, 채송화, 코스모스 등 정말 다양한 화초를 키웠다. 또 집안 서가 위에도 꽃이 빠질 틈이 없이 사랑하는 꽃을 가까이 두고 살았다.
그는 나무에 피는 꽃보다는 일년초를 더 좋아하였는데, 이는 집안이 좁았기 때문이지 그런 꽃을 원래 싫어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집필 중에도 틈나면 화단 가꿀 생각에 골몰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화초 가꾸기 또한 단순한 취미가 아니고, 지친 심신을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는 일로 생각한다.

단 하루를 보더라도 들인 품은 아까울 것이 없다. 초목과 사는 기쁨―인간사에 지쳤을 때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는 듯하다.(인물 있는 가을 풍경)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화초 가꾸기에서 그의 독특한 심미의식을 구축하게 된다.

아름다운 것을 다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름다운 것을 참으로 아름다워하는 것과는 뜻이 다르다. 방 속에 묻혀 뜰 밖의 꽃을 아름다우려니 환상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몸소 뜰 밖에 나가 그 꽃을구경함이 나으며 팔짱을 끼고 다만 꽃을 바라보는 편보다는 손수 한 포기를 떠다가 뜰앞에 옮기거나 꺾어다가 책상 위에 꽃는 편이 몇층이나 더 모람 있는지 모른다.(화춘의장)


영화
이효석은 한 달에 7,8회나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를 즐겼는데, 거의 다 서양 영화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또 [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Miss 다니엘 다류우]라는 글을 썼는데, 이것은 그가 본 영화의 여자 주인공에게 보내는 일종의 팬 레터이었을 만큼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가 인상깊게 본 영화로 꼽고 있는 것들을 보면, <가을의 여성>, <안나 카레리나>, <악성 베토벤>, <망향> 등이다.
또 그는 [화륜]과 [출범시대]라는 시나리오까지 썼으니, 영화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그의 예술활동의 한 영역이었던 것 같다. 또 그는 "영화를 보고 얻는 것이 여러 가지인데 특히 스토리 전개의 기법을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영화가 그에게는 문학 창작의 교과서이었던 것 같다.


여행
이효석은 체질적으로 도시를 싫어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는 주택을 한적한 근교에 정했지만, 그래도 도시를 벗어나고픈 생각을 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이러한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생활이었다. 음악이 그렇고 영화가 그렇듯 여행도 그에게 여느 취미도 아니요, 단순한 심신의 재충전 수단도 아니었다. 그는 여행을 '새로운 체험을 함으로써 생활의 진폭을 넓히고 사상의 씨를 얻는' 기회로 생각하였다.


거기[여행사]에는 얼마만의 꿈이 준비되어 있고, 미지의 생활에의 유혹이 있다. 사람들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즐거운 생명감이 절실하게 맥박쳐 옴을 느낀다. 담당 소녀에게 지폐를 내주고 차표를 손에 쥐기만 하면 된다. 새로운 체험에의 약속이 계약된 셈이다.……
여행 중에 보고 듣고 생각했던 일들은 그대로 생활의 진폭을 넓히고 사상의 씨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척한 겨울 여행도 또한 즐거운 것이 아닐 수 없다.(겨울 여행)

그는 국내 여행지로서 금강산, 주을, 동해안 등 주로 관북지방의 명승을 꼽았다. 그러나 "기선 한 척이 생기면 항구에서 항구로 꿈을 찾아다니겠다"라든지, "날개가 달려 공중을 훨훨 날 수 있다면 세상의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며 구경하겠다"라든지, "오래 머물고 싶은 곳으로 프랑스를 꼽는다"든지 하여 그가 동경하는 유럽 여행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밖의 취미
그는 스키 장비 한 세트를 장만하자면 "원고지 200매를 채워야 하고, 원고지 200매를 채우려면 피나는 노력의 한달을 허비해야 하므로 확실히 비싼 대상이다"라고 말하면서 무척 사치한 줄 알면서도 스키를 즐긴다(계절의 낙서).
그의 수필 [애완]에서는 한때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수필 [고자기]에서는 그의 학교 연구실의 화병으로 쓰기 위해 고자기를 사 들이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다른 애완 취미는 그다지 뚜렷한 것이 없다.

가정생활


행복했던 부부 생활
그의 부부 생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그의 자서전적 기록으로 해석되는 단편소설 [향수](1939)나 그 밖의 작품과 편지 등에서 단란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연애 결혼을 한 부부는 무척 서로 사랑했던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공평했던 것은 아니다.
이효석은 그 당시 한국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의 위치를 견지하고 있었다. 집에서는 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밖에서는 지식인으로서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국제 정세에 비해서 상당히 호사스러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 부인에게 미안한 감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세상의 남편들같이 고집스럽고 자유로운 욕심장이는 없다. 아내의 알뜰한 애정을 받으면서도 그 밖에 또 무엇을 자꾸만 구하는 것이다. 집에 들어서는 범사에 봉건왕이요, 폭군 노릇을 하면서 마음속에는 항상 한없는 꿈과 욕망을 준비해 가지고는 새로운 밖 세상을 구해 마지않는다. 참으로 그리마의 발보다도 많은 열 가닥 백 가닥의 마음의 촉수를 꾸미로 그 은실금실의 끝끝마다 한 개의 세상을 생각하고 손닿지 않는 먼 데 것을 그리워하고 화려한 무지개를 틀어본다. 그 자기의 마음 세상 속에 아내는 한 발자국도 못 들어 서게 하고 엄격하게 파수보면서 완전히 독립된 왕국을 몰래 다스려간다.
일생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아내가 그 왕국에서는 가장 먼 것이다. 이것이 세상 남편들의 어쩌는 수 없는 타고난 천성머리니 나 역시 그런 부류에서 빠진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며 세상에서 꼭 한 사람밖에는 없다고 생각해 주는 아내의 정성의 백의 하나도 갚지 못하게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향수)


한편 부인은 이효석을 헌신적으로 사랑하였다. 결혼 때문에 일본 유학도 포기하였고, 가난한 문인 이효석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는 "이웃에서는 며느리를 가진 안 늙은이들 입에서 오르리만큼 소문이 나서 모범주부로 첫손을 꼽히게 된 아내였다."(향수)
그러나 갓 스무 살을 넘긴 그녀가 집안에 틀어 박혀 살림만 사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이효석과 아이들, 그리고 그의 집이 온 세상이었다.
그녀의 사진을 보면, 얼굴이 동그랗고 눈이 크며 키가 아담하여, 그 당시 양갓집 부인의 전형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부인, 병석에서 "착한 사람은 먼저 가는 법예요"라고 되뇌던, 착했기 때문에 너무나 단순한 부인이 갑자기 별세한 후 이효석은 슬픔과 회한을 여러 글에서 보이고 있다. 이효석의 문우였고 그의 가족과도 가깝던 여류 소설가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을 보자.

제가 불행을 당한 지도 벌써 석 달은 넘어 넉 달째 잡아듭니다. 고인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비감을 지금껏 잠시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로 사랑을 많이 받아온 편이라고 생각하오나, 그 중에서 단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같이 지금 생각하면 뼛속에 젖어드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남자같이 다욕하고 횡포한 것이 있을까요. 늘 아내에게는 허물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수록 깊이 반성되며 간 사람에게 대한 애감이 더욱 가슴을 파고 듭니다.(최정희씨에게―뼈속 깊은 애감)

또 그는 그녀가 별세한 다음 한식날 성묘하고 와서 슬픔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부인의 묘소는 평양 근교임을 알 수 있다.

무진장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얼굴과 심정을 어지럽히는 것이요,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은 귀하고 아까웁기도 하다. 눈물은 슬픔을 맑게 하고 깊게 한다.
아내를 잃은 지 석달에 비 오는 날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 비는 사람의 마음을 모방하려는 것이다. 마음 속에 비가 오듯 비도 오는 것이다.(한식일)

이효석은 부인이 별세한 후 곧 이어 차남 영주를 잃는다. 이에 상심이 극에 달한 그는 만주와 중국 등지를 방랑하면서 건강을 많이 해친다. 1941년 다시 평양에 돌아온 그는 병원에 입원하여 중요한 절단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1942년에 급성 결핵성 뇌막염에 걸린 그는 5월 25일 오후 7시 30분에 눈을 감는다.

아이들과의 생활
그의 가정생활은 주로 평양 창전리 집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에는 아이들이 웬만큼 자라난 아이들과 집에서 즐거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음악을 몹시 즐겨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고 자신도 치고 가족 모두 쳤다고 한다. 그리고 축음기로도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서재에 놓였던 야마하 피아노와, 가끔 즐겨 치시던 쇼팡, 아버지는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요새처럼, 스테레오 장치가 된 것도 아니고 옛날 축음기 판 하나 걸고 다시 바늘 하나 갈아끼고 또 열심히 태엽을 감아 Mozart라는 이름이 금박으로 굵게 쓰여 있는 두꺼운 레코오드를 올려놓고 듣는 것이다. 음이 늘어지면 다시 또 태엽을 감아야 하고―그 과정은 어린 마음에도 무척 신기하고 즐거워 보였다.(아버지의 추억)

또 차녀 유미와 정원에서 비누방울 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는 아이들과 정원에서 같이 놀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노을이 지는 저녁녘에 아버지와 함께 비누방울 날리는 놀이를 할 때면...(아버지의 추억)

또 유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차녀를 데리고(다른 가족의 동행 여부는 불분명하다) 주을온천에 갔었고, 외국인의 별장촌을 구경하기도 하고 유랑극단 공연도 구경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외식을 했으며, 옥수수를 얻어다 주려고 대동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효석의 만년


부인의 별세
부인 이경원은 원래 건강한 여인이었으나 마지막 한 두해는 만성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병명은 밝혀지지 않으나 그녀는 1939년 초겨울부터 병원을 오가다가 1940년 정월 병세가 악화되자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하게 이르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월 27일(음 12월 19일) 향년 28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인은 복막염이었다고 한다.
이효석은 부인의 입원 무렵부터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그녀가 죽자 큰 충격과 슬픔에 잠긴다.


방황
부인과 사별한 후 이내 그는 차남 영주를 잃었다. 그는 심한 상실감과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 한동안 만주와 중국 일대를 여행한 후 돌아와서 1940년 가을 추억이 담긴 창전리 집을 버리고 기림리로 이사를 간다.


건강 상실과 와병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는 폐수술일 것으로 짐작되는 '몸의 한 중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고 더욱 쇠약해진다.
그는 1942년 5월 3일 심한 감기 증상을 보이면서 출근했다가 강의를 마치고 곧 귀가하여 병석에 눕는다. 이때부터 그는 강력한 두통으로 신음하기 시작한다.
5월 6일 평양도립병원에 급거 입원한 그의 병명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그 당시 난치병으로 간주되던 이 병은 급속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임종
병석에서 가장 보고 싶어 한 사람은 유진오였으나, 급거 달려온 그는 의식 불명인 상태의 이효석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병실에는 이효석의 늙은 부친과 부인 사후에 이효석을 사모하던 왕수복이라는 여인이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의사의 단념적 선언을 듣고 이들은 22일 이효석을 기림지 집으로 데려갔다. 점점 악화되던 이효석은 25일 오전 7시 30분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그의 향년 36세이었다.


사후
이효석의 유해는 그의 부친에 의해 운구되어 고향땅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에 매장되었다가 용평면 장평리의 영동고속도로변으로 옮겨졌으며, 1998년 다시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